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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노트) 자기 신뢰의 힘
    book 2023. 2. 5. 15:32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자신이 진실이라 여기는 것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진실이라고 생각하리라 믿는 것, 이것이야말로 비범한 재능이다.

    그대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확신을 드러내라.
    그러면 그 말은 보편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대 마음속에만 있던 것이 때가 되면 겉으로 드러나고, 그대가 처음에 가졌던 생각이 결국에는 마지막 심판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다시 그대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모세나 플라톤, 밀턴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들이 책이나 전통 같은 것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는 버드나무가 아니다.
    우리는 홀로 설 수 있고, 홀로 서야만 한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면 그 속에서 새로운 힘이 생겨난다.

    우리는 신의 말씀을 대변하는 존재이며 세상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의존하는 태도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법률과 책과 우상과 관습일랑 창밖으로 내던지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당당하게 행동하라.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를 동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마워하고 존경할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야말로 인간의 삶에 빛을 되찾아주고, 인간의 이름을 모든 역사에 길이 남길 것이다.

    시인이나 현자가 보여주는 천상의 빛을 찾는 대신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우리 안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알아보고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무시해버린다.
    그러다가 스스로 무시해버렸던 신의 생각을 천재들의 작품에서 발견한다.
    자신의 생각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위엄을 안고 우리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이 가르쳐주는 가장 감동적인 교훈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전부 반대편에서 소리칠 때일수록, 자신의 자연스러운 느낌을 흔들림 없이 고수하라.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낯선 사람이 나타나,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느껴왔던 것을 제법 아는 척하며 그럴 듯하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부끄러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다.

    외부의 의존 대상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홀로 설 때 비로소 강해지고 승리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구하지 말라.
    모든 것을 스스로 하라.
    힘이란 내면에서부터 샘솟는 것이다.
    우리가 약한 이유는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도움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고 주저 없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몸을 곧게 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사람은 기적을 이룬다.

    여러 다양한 행위도 그때그때 정직하고 자연스럽게 행하면, 그 속에서 하나의 동일성이 생겨난다.
    모두 다른 것처럼 보여도 각각의 행위들이 동일한 의지에 따라 조화를 이룬다.
    조금 거리를 두고 높은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다양성은 보이지 않는다.

    더없이 훌륭한 배도 바람에 따라 수없이 방향을 바꾸며 지그재그로 항해한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배의 행로는 대체로 일직선을 그린다.
    마찬가지로 진정성이 있으면 우리의 행위는 저절로 설명이 되고, 우리의 다른 행위들도 더불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영합은 어떤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라.
    그러면 이제까지의 모든 행동들이 이제 우리 자신을 정당화해줄 것이다.

    어리석은 일관성은 편협한 정신에서 비롯된 허깨비와 같다.
    소심한 정치가와 철학자, 신학자들이나 이런 허깨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위대한 영혼에게 어리석은 일관성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에 얽매이느니 벽에 어른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신경 쓰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오늘 생각한 것은 오늘 분명하게 말하라.
    그리고 내일은 내일 생각한 것을 분명하게 말하라.
    오늘 한 말과 모순될지라도 그렇게 하라.
    그러면 오해를 받을 게 분명하다고? 오해를 받는 게 그렇게 안 좋은 일인가?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예수, 루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모두 오해를 받았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순수하고 지혜로운 영혼은 누구나 오해를 받았다.

    나는 부모를 봉양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충실한 남편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이런 역할들에 충실할 것이다.
    나는 당신들의 관습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이 될 것이다.
    당신들을 위해서 더 이상 나 자신을 길들이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도 나를 길들일 수 없다.
    당신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더욱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해도, 나는 당신들이 마땅히 그렇게 하도록 변함없이 노력할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도 숨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신성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내 안에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가슴이 시키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무엇이든 열심히 할 것이다.
    당신이 고귀하다면 난 당신을 사랑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위선적인 애정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 일에 온 마음을 쏟고 최선을 다할 때 괴로움을 잊고 쾌활해진다.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평화를 주지 못한다.
    구원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어떤 영감도, 창조도, 희망도 없다.

    자기 자신을 믿어라.
    그러면 그대 마음속의 단단한 현(絃)이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해왔고,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시대정신에 자신을 맡겼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있음을, 그것에 따라 행동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재산이나 정부에 의지하는 것은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인간은 오랜 세월 외부 대상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종교나 학문, 정치제도를 재산의 보호자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제도에 대한 공격을 싫어한다.
    제도에 대한 공격이 곧 자기 재산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품성이 아니라 소유한 것을 근거로 사람을 평가한다.
    그러나 교양인은 자기의 본성은 귀중히 여기는 반면 재산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한다.
    어떤 우연에 의해, 유산이나 증여, 범죄를 통해 얻은 재산은 특히 더 부끄럽게 여긴다.

    불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할 때, 의지가 약할 때 생긴다.
    스스로를 돕는 사람은 신에게나 인간에게나 영원히 환영받는다.
    그에게는 모든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모두가 그에게 환영의 말을 던지고 영예를 선사한다.
    모두가 부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세상을 정복하는 법
    우리의 정신은 저급한 것을 목표로 삼도록 교육받은 탓에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다.
    가식적이거나 남의 말에 고분고분한 사람 말고는 아무도 할 일이 없게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힘들고 단조로운 일을 반복하는 노동자가 되거나 혐오감에 시달려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그 치유책은 무엇일까?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희망에 젖어 이런 장벽들을 향해 몰려들고 있는 수많은 청년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단 한 사람이라도 타고난 소질 위에 몸을 세우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이 거대한 세계가 도리어 그의 편이 되리라는 것을.

    여행에 대한 갈망은 우리가 깊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몸이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밖을 떠돈다.
    모방을 하는 것이다.
    마음의 방황이 결국 모방을 낳는 것 아닌가?
    그러나 예술이 번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영혼이 예술을 창조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모델을 찾는다.
    그러니 모방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고집하라.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신만이 가르쳐줄 수 있다.
    스스로 그것을 발휘할 때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사람도, 알 길도 없다.
    셰익스피어를 가르쳤다는 교사가 어디에 있는가?

    세계가 그대를 위해 존재함을 알라.
    우리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오직 이것뿐이다.
    아담이 가졌던 모든 것, 시저가 했던 모든 일을 우리도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다.
    아담은 하늘과 땅을 자신의 집이라 하고, 시저는 로마를 자신의 집이라 했다.
    그대는 작은 구둣방이나 백 에이커의 경작지, 혹은 책으로 둘러싸인 다락방을 그대의 집이라 부를 것이다.
    근사한 이름은 없어도 그대의 영토는 아담이나 시저의 영토만큼 훌륭하고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니 그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라.
    그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생각에 삶을 맞추는 순간, 그대의 세계가 드넓게 펼쳐질 것이다.
    영혼이 그대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것 속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이 세계에서 하나의 주체적인 인간으로 서지 못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나의 인격체로 평가받지 못하고, 각자 이루어내야 할 고유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몇백 명이나 몇천 명으로 이루어진 어떤 분파나 당의 일원으로서만 인식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허영심이 강한 여행자는 왕후나 귀족, 귀부인에게 들은 말이나 행동을 들먹이며 자신의 삶을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야심에 찬 속물은 자신의 수저나 브로치, 반지 등을 자랑하고, 화려한 명함이나 자신에게 쏟아진 찬사를 잘 간직해둔다.
    좀더 교양 있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특별히 흥미있고 시적인 일들을 강조한다.
    로마에 갔던 일이나 그가 만난 천재, 그가 아는 명망가, 어제 본 멋진 풍경, 산에서 한 생각들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삶에 낭만적인 색조를 덧칠한다.
    그러나 신을 예찬하는 사람은 소박하고 진실하다.
    전혀 허풍스럽지 않으며, 좋은 친구도 갖고 있지 않고, 기사도 정신도 없고, 모험적인 사건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속에, 평범한 일상의 진실한 경험들 속에 머문다.
    현재의 순간과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이 그의 생각에 스며들어 빛의 바다마저 흡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자만심이라도, 자만심을 가진 자는 그로 인해 반드시 피해를 입는다.”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는 데 배타적인 사람은 저 혼자만 즐거움을 누리려다가 도리어 자신을 더욱 소외시키게 된다.
    종교적인 배타주의자는 다른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신이 들어갈 천국의 문도 닫아버린다.

    빌리는 즉시, 한쪽에서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생각이 생겨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은혜를 입었다는 마음이 일어난다.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로 나뉘는 것이다.
    이런 거래는 두 사람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새로운 거래가 있을 때마다 그 거래의 성격에 따라 이들의 관계도 달라진다.
    이로 인해 우리는 ‘공짜로 얻는 물건보다 더 비싼 것은 없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약점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은 언제나 자진해서 낮은 자리에 서려 한다.
    편안한 방석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잠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자극을 받고, 고통을 겪고, 패배를 경험해야만 비로소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자만의 망상에서 깨어나야만 절제와 진정한 능력을 얻는다.
    현명한 사람은 적의 손에 일부러 자신의 몸을 내던진다.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는 것은 적보다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적에게 입은 상처는 곧 나아서 아물고 딱지가 앉아 쉽게 떨어진다.
    그래서 적이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을 때 그는 이제 불사신이 된다!

    어떤 비밀이든 밝혀지고, 어떤 죄든 처벌되며, 어떤 덕이든 보상받고, 어떤 잘못이든 바로잡힌다.
    이것이 우주의 필연 법칙이고 우주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배우는 자는 역사를 능동적으로 해석해야지 수동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
    자신의 삶을 주요 교재로 삼고, 책은 주석처럼 이용해야 한다.
    그러면 역사의 여신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내리지 않는 신탁을 그에게 내려줄 것이다.

    먼 옛날 널리 이름을 떨친 사람들의 업적이 오늘날 자신이 하는 일보다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역사를 바르게 읽지 못한다.
    배우는 자는 자신의 몸속에 온 역사가 살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당당히 집에 앉아 자신이 세계의 어떤 나라 어떤 정부보다도 위대함을 깨달아야 한다.

    배우는 자는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롭고 용감해야 한다.
    ‘자신의 본성에서 우러나지 않는 한 어떤 속박도 받지 않는다’라는 자유의 정의에 따라야 한다.

    배우는 자는 또한 용감해야 한다.
    배우는 자라면 마땅히 공포를 버려야 한다.
    공포는 언제나 무지에서 솟아난다.
    위험한 시기에 자신은 보호받는 계층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움을 회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또 타조처럼 꽃이 만발한 숲에 머리를 숨기거나, 두려움을 잊고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휘파람을 부는 아이처럼 시를 읊조리면서 일시적으로 평화를 구하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런 노력에도 두려움은 가시지 않으며 두려움은 우리에게 더욱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

    배우는 자는 당당하게 돌아서서 두려움을 직면해야 한다.
    두려움의 눈을 들여다보고, 본성을 탐색하며, 근원을 살펴야 한다.
    바로 앞에서 두려움이라는 사자가 새끼를 낳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면 두려움의 본성과 영역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연약한 청소년들이 도서관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들은 키케로, 로크, 베이컨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는다.
    하지만 키케로나 로크, 베이컨도 책을 썼을 때 도서관에 있던 청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모른다.

    이로 인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벌레’가 생겨나고 있다.
    책 자체를 존중하는, 책에만 박식한 계층이 생겨나는 것이다.
    잘 사용하면 책 이상의 것은 없다.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책보다 나쁜 것도 없다.
    그렇다면 책을 잘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책은 다만 영감을 얻는 데만 유용하다.
    책에 매혹돼 자기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거나 스스로 체계를 만들지 않고 위성(衛星)이 되어버릴 바에는 차라리 책을 안 읽는 편이 낫다.

    어떤 연설가의 말을 듣든,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빈약함과 풍요로움을 보면 나는 그가 삶을 얼마나 경험했는지 알 수 있다.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는 타일과 층샛돌이 채석장에서 나오듯, 말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러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문법을 배우는 방식이다.
    대학이나 책은 단지 들판이나 공장에서 만들어진 언어를 복사할 뿐이다.

    곡식을 키우는 사람은 들판으로 나가 곡식을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자기 일의 참된 존엄성에서 힘을 얻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곡식과 마차는 보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개 농부로 전락해버린다.
    상인도 자신의 일에 이상적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고, 틀에 박힌 매매술에 얽매여 돈에 영혼을 팔아버린다.
    승려는 의식으로, 변호사는 법전으로, 직공은 기계로, 선원은 배의 밧줄로 축소될 뿐이다.

    직능의 분할 면에서 보면 학자는 지력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바람직한 상태에 있을 때 학자는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타락하거나 사회의 희생자가 될 때는 단순한 사상가, 더욱 나쁘게는 남의 사상을 흉내 내는 앵무새가 돼버린다.

    책을 현명하게 읽으려면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진정한 학자치고 용맹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행동은 사상의 출발로서 사상이 무의식에서 의식의 상태로 변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만큼만 안다.
    우리는 누구의 말에 생명력이 있고 누구의 말에 생명력이 없는지 즉시 알아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생을 아는 만큼만 불모의 황무지를 정복하고 그곳에 나무를 심을 수 있으며, 우리의 존재와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모든 자연과 사상이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함을 깨달아야 한다.
    더 없이 높은 존재가 인간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자연의 원천이 우리 마음속에 깃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예수가 말했듯 “밀실에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한다.
    신은 자신에게 비겁한 사람에게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위대한 신이 말하고자 한 바를 알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이 올리는 모든 경배의 소리에서 물러나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뛰어난 변론가로 인정받는 사람이나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 사람과 자신의 생각에 도취되어 이런저런 예언을 해대는 광적인 신비가.
    이 두 부류의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한쪽은 사실의 참여자 혹은 소유자로서 자신의 ‘마음 안으로부터’, 다시 말해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말을 한다.
    반면에 다른 한쪽은 단순한 방관자로서 ‘마음 밖으로부터’ 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토대로 아는 척한다.

    우리의 종교는 저속하게도 신자의 수를 토대로 삼는다.
    그러나 아무리 간접적으로라도 신자의 수로 호소하면, 그곳에는 종교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신이 달콤한 생각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에게 신자의 수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신 안에 앉아 있는데 누가 감히 비집고 들어오겠는가? 완전히 겸허한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순수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데, 칼빈이나 스웨덴보리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신에게 호소할 때는 여럿이 하든 혼자서 하든 별 차이가 없다.
    권위를 바탕으로 하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권위에 의존하는 것은 종교의 쇠퇴와 영혼의 쇠락을 가늠하는 기준일 뿐이다.

    영혼은 위대하지만 평범하다.
    영혼은 아첨꾼도, 추종자도 아니다.
    결코 그 자신을 떠나 다른 것에 호소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믿기 때문이다.
    모든 단순한 경험과 과거의 일은, 아무리 오점이 없고 성스러운 것이어도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는 보잘것없어진다.

    우리는 자연 법칙의 영속성은 받아들이면서, 자연이 절대적 존재라는 사실에는 여전히 의문을 품는다.
    열이나 물, 질소 같은 현상은 확고히 믿으면서도, 자연을 하나의 실체가 아닌 현상으로 본다.
    정령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연을 단순히 하나의 우연이나 인상으로 본다.
    이는 교양이 인간의 마음에 미친 획일적인 영향 때문이다.

    사물을 자신의 생각에 맞추는 사람, 자신의 생각을 사물에 맞추는 사람

    감각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사물에 맞춘다.
    반면에 시인은 사물을 자신의 생각에 꿰어맞춘다.
    전자는 자연이 뿌리 박혀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후자는 자연을 유동적인 것으로 보고 자연 위에 자기의 존재를 새긴다.
    그래서 감당하기 힘든 세계도 시인에게는 부드럽고 다루기 쉬운 곳이 된다.
    시인은 먼지나 돌에도 인간성을 부여해서 그것을 이성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이성이 물질계를 이용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는 자연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이 어느 시인보다도 탁월했다.
    그는 제왕 같은 시혼(詩魂)으로 삼라만상을 마치 장난감처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던지면서 마음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심상들을 표현하는 데 이 장난감을 이용했다.

    기도는 가장 높은 관점에서 삶의 모습들을 성찰하는 것이다.
    진리를 보고 기쁨에 넘쳐 환호하는 영혼의 독백이다.
    자신의 행위를 선한 것으로 선언하는 신의 정신이다.

    사사로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도는 천박하다.
    이런 기도는 도둑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자연과 의식의 일치가 아니라 분리를 전제로 한다.

    신과 하나가 되는 순간, 인간은 결코 구걸하지 않는다.
    신과 하나가 되는 순간, 인간은 일체의 행위에서 기도를 발견한다.
    풀을 뽑기 위해 들판에 무릎을 꿇은 농부의 기도, 노를 젓기 위해 배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공의 기도.
    하찮을지언정 이런 참된 기도야말로 전 자연으로 울려퍼진다.

    모든 위대한 시인들의 내면에는 그들이 구사하는 어떤 재능보다도 우월한, 인간성에 대한 지혜가 들어 있다.
    저자나 재치 있는 사람, 정당인, 세련된 신사도 인간성 자체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인간성은 호머 속에서, 초서 속에서, 스펜서 속에서, 셰익스피어 속에서, 밀턴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들은 진리에 만족하고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래서 열등하지만 인기 있는 작가들의 광적인 열정과 격렬한 색채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너무 딱딱하고 차갑게 여겨진다.
    그들은 유익한 영혼에 자유로운 흐름을 허용해서 시인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영혼은 그들의 눈을 통해 자신이 창조한 것을 다시 보고 축복한다.
    그 영혼은 지식보다 우월하고, 그것이 만들어낸 어떤 작품보다도 지혜롭다.

    모든 사람은 세계의 아름다움에 어느 정도 감명을 받는다.
    그중에는 희열을 느낄 만큼 강하게 감동을 받는 사람도 있다.
    아름다움을 향한 이런 사랑이 바로 취향(taste)이다.
    아름다움을 유달리 사랑해서 그것을 찬탄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형식으로 담아내려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예술(art)이다.

    모든 자연물은 영혼의 상징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혼의 상징이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정신의 상태와 상응하며, 정신의 상태는 자연계의 현상으로 드러난다.

    격노한 사람은 사자와 같고, 교활한 사람은 여우와 같으며, 견실한 사람은 바위와 같고, 학식이 있는 사람은 횃불과 같다.
    어린 양은 천진난만함을, 뱀은 교활한 악의를, 꽃은 미묘한 애정을 나타낸다.
    빛과 어둠은 앎과 무지를 나타내는 친근한 표현이고, 열기는 사랑을 보여준다.

    동물이나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순수한 행동은 농부나 사냥꾼, 선원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도시는 성장을 강요하고 우리를 말이 많은 유쾌한 사람으로 만든다.
    하지만 우리를 인위적인 존재로 변화시켜버리기도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개개인의 타고난 본성과 장점이다.
    그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이자 경이이기 때문이다.
    이 경이는 아무리 알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자연과의 대화에서 소중히 간직할 것은 바로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경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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